[스크랩] 통한의 역사 아바이 마을이 있기까지
통한의 역사 아바이 마을이 있기까지
아바이마을의 유래와 역사 일본 제국주의 로부터 해방된 속초지역은 38선 이북지역으로 북한에 편입되어 공산 치하에 처해 있었으나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국군의 북진과 함께 수복된 지역이다. 한국전쟁과 함께 북한 공산 치하에서 자유를 억압받고 살던 북한 지역의 주민들은 자유를 찾아서 남으로 피난을 내려오게 되지만 전시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국군의 북진을 따라 북으로 가족과 함께 이동을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면 조금이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열망을 가슴에 담고 있던 실향민들은 국군주둔지 인근에 살집을 마련하게 되는데 국군 제 1군단이 주둔하면서 아무도 살지 않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청호동 바닷가 모래톱에 하나 둘 정착하면서 우리나라 최대의 피난민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빠르면 보름 길어봤자 석달이면 고향에 갈줄 알았던 실향민들은 반세기가 훨씬 지나고 있지만 고향을 그리워 하며 같은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과 함께 아바이마을을 만들고 통일될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해방전 갯배나루의 전경및 변천과정 아바이 마을은 속초시내 중심을 연결하는 실향민의 상징이라 불리는 갯배는 일제말기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생긴 도선이다 . 당시 부월리(2구)와 속진(중앙동)이 맏닿아 있던것을 속초항 개발을 위해 준설하면서 외항과 내항 (청초호) 이 통수 되면서 수로가 생기게 되었으며 속초읍에서 갯배한척을 만들어 도선에 이용하였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갯배는 트럭한대와 우마차 한 두대를 같이 실은 크기였다고 하며 6.25 동란으로 패선이 되었지만 청호동에 많은 실향민들이 정착하면서 수산물거래를 위한 청호동 주민들의 교통수단이 필요하게 되면서 1955년 속초읍에서 갯배선을 만들었으며 1961년 한척을 더들어 정식 도입선 허가를 받아 운영햇다. 아바이 마을 사람들이라면 갯배에 대한 한두가지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것이며 청호동 사람들의 고된 삶과 애환을 호수에 뛰우며 속초시내와 청호동을 묵묵히 이어주고 있다.
1950년대 신포마을 전경및 변천과정 현재 속초항의 주변지역이엇던 속진리와 전통적인 반농반어 마을이었다. 속진리는 영금정에서 수복탑에 이르는 항구로서 작은 어촌이었고 , 속초리는 속진리와 연이은 갯배나루 왼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비록 반농 반어의 산업형태를 이루고 있었지만 주된 생업은 농토가 많지 않은 관게로 어업이 기반이 되어갔다. 1930년대에 들어와 청초호가 항구로 개발되고 근해의 풍부한 수산자원으로 인해 어항으로 발전했으나 양양철광이 개발되면서 철광석을 운반하는 항구로도 큰몫을 차지하였고 한국전쟁이후로도 실향민에 의해 어업이 크게 발전하게 되면서 속초항에는 대규모 선단을 이뤄 고기잡이 나서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속초항은 속초수산업의 중심으로 1962년 수산물 운송 지정항으로 되면서 동해안의 중요한 어항으로 손꼽히고 있는 항구이다. 700여척에 이르는 어선이 오징어 명태 꽁치 멸치조업을 하고 있었으나 최근 연안수산자원의 감소와 어업환경의 변화로 인해 수산업에 대한 이직이 늘어가고 있으며 어항에서 관광 무역항으로 기능이 변해가고 있다.
1950년대 청호동 부둣가 및 물량장 변천과정 한국전쟁 당시 수복된 속초지역은 대한민국 정부로 행정권이 이양되기전까지 군정이 실시되었는데 군정은 속초지역의 피난민 정착촌 형성을 위해 주택건설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래서 초기에 청호동에 유입된 피난민들은 현재 청호동 9, 10, 11통 지역 중심으로 좁은공간에 움집이나 판자집등을 짖고 신포마을 , 엥꼬치마을, 자꼬치마을, 단천마을등 집단취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살수가 없는 국유지가 정착민의 거주지로 형성되면서 땅에 대한 개인적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없이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였고 실향민들만의 생활 거주 공간을 확보하게 되면서 좁은 가로를 형성하게 되었고 담장이 없는 공동의 서비스공간 (화장실) 등을 가지는 독특한 청호동 거리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아바이 마을의 독특한 거리와 가옥 형태는 실향민 2, 3세대가 고향을 떠나고 도시의 재개발등 주변 여건의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1998년 신수로 건설로 인해 주민이 미리내 마을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신수로 교량의 건설과 속초 관광선 부두의 조성등으로 한국전쟁이후 반백년을 이어온 실향민들만의 주거문화는 커다란 변화와 더불어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음을 안타까워 할 뿐이다.
68 해일등 주요 사건 사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고향을 떠났던 실향민들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시절을 견디며 보다 윤택한 삶을 살기위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며 생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 장비도 현대화 되지 못했고 항구시설도 낙후된 상태에서 태풍과 해일과 같은 대자연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으며 연약한 인간은 무릎을 꿇고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풍랑속에서 바다와 함께 한스러운 생을 마감했으며 실향민들의 정성과 꿈이 담겨있던 어선들 또한 수장되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강한 태풍은 그동안에 쌓아놓은 우리들의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기도 했읍니다.
하지만 주저않을수 만은 없는 일이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나고 그리운 고향 산천을 밟아볼 날을 기다리며 그리고 가족들에게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도 실향민들은 묵묵히 푸른 동해바다를 개척하여야만 했건 시절이었다 .
1950년대 주민들의 생활상 한국전쟁후 아바이 마을에 정착한 실향민들이 자연스럽게 할수 있는 생업은 고기잡이였다. 이북고향에서 배를 타던 어부들이 많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농토와 같은 생활의 기반이 없었던 이들 실향민이 먹고 살기위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을 고단히 놀리면 가능한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가 되는것이었다 . 수복이후 피난민들이 어업에 사용한 배는 피난 당시 타고 월남한 범선이 창이배와 강원도. 경상도 지방의 주된 범선인 오마리배가 주종이었으나 , 어업인구의 증가와 전문적인 직업화는 어선과 어구의 개선이 필수적이었으므로 1950년대 중반에 들면서 범선은 동력선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실향민들의 유일한 생업의 수단이 되었던 어업의 발전은 속초가 수산업을 근간으로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고 더불어 산업화 , 도시화 선도하였으며 1963년 속초읍에서 속초시로 승격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읍니다 . 속초를 실향민의 도시라 하는 이유가 실향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만 다른측면엔 실향민의 의해서 발전된 도시라는 의미도 갖고 잇는 도시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주민들의 생활상 1950~1960년 아바이 마을에는 대부분의 세대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그들이 좁은 대지위에 지은 판자집 보금자리 지붕에는 명태 오징어 도루묵을 말리는 풍경을 흔히 볼수있고 해안가 공터에는 오징어 명태 덕장들이 줄지어 있었고 파도가 높이 이는 날에는 미역을 채취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말려진 오징어 명태는 아낙네들이 머리에 가득이고 손수레 한가득 싣고 갯배를 이용해 수산물 위판장이나 중앙시장으로 팔려나갔으며 이러한 상거래는 청호동 주민들의 주된 수입원이 되어 부를 축적해 갈 수 있었다 .
하지만 동해 연근해 어족자원이 고갈되고 대규모 수산물 가공 공장이 속속 들어서면서 정겨운 어촌마을의 풍경은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래도 속초에는 오징어를 할복하여 덕장에서 말리고 어망손질하는 풍경은 아바이 마을이 갖고 있는 우리들의 정감어린 어촌 풍경이다 .
가을동화와 아바이 마을 2000년 9월부터 11월 까지 방송되었던 드라마 가을동화 우리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속에 방송되었으며 드라마의 동남아 진출은 한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동남아 여러나라에서도 인기리에 방송된 가을동화의 여파는 가을동화의 주된 촬영지였던 청호동 거리 갯배 은서네집과 더불어 아바이 마을을 동남아 관광객은 물론 우리 국민들의 주요관광 코스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촬영지를 둘러보는 단순한 관광이 아닌 실향민 정착촌이라는 독특한 마을과 거리를 거닐며 함흥냉면과 아바이 순대와 같은 실향민의 음식도 체험하는 문화체험 관광코스로 인기가 있었다.
갯배를 타보고 은서네 집에서 기념품을 장만하고 청호동 백사장을 거닐고 나서 시장기가 동하면 청호동 거리 냉면집을 찾아 함흥냉면과 아바이 순대를 찾는 실향민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세계에 하나뿐인 문화관광지 아바이마을 이었다.
아바이 마을이 고기잡이 수산물을 건조하는 어촌마을이 아니고 지역의 독특한 문화도 충분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는 본보기를 보여 주었으며 속초가 자연관광지와 더불어 문화체험관광지로 패턴의 변화를 추구하는 시금석이 되게 한것은 아바이 마을과 실향민이었다.
2007년도 달라진 청호동의 모습 청초호와 동해바다를 사이에 두고 발달한 모래톱마을, 황무지나 다름없는 매마른 모래땅에서 하나 둘 모여 판자집 짓고 옹기종기 모여서 마을을 이루며 청호동을 키워온지 50년이 지났다 . 북쪽에 두고온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악착같이 살아온 실향민 정착촌인 아바이마을이 현재는 속초제일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신수로 개설과 함께 아치교로 만들어져 밤에도 아름다운 경관을 뽐내고 있는 청호대교가 웅장한 모습으로 청호동 중심축이 되고 있다.
여름철 2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고 잇는 우리나라 제일의 청정 해수욕장인 속초해수욕장과 함께 세계적인 철인들이 매년 아바이마을 백사장에서 출발하여 속초시내를 일주하는 설악트라이애슬런 대회는 피서철 속초의 대표적인 볼거리가 되고있다.
이렇게 아바이 마을은 피난민들의 정착촌으로만 유명한것이 아니라 이제는 국내관광 일번지를 자부하는 속초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읍니다
실향민을 애환과 아바이마을에 대해서 소개를 하였읍니다 내고향 속초에 많이 놀러 오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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